소멸의 세 번째 방식

카테고리: 경험담, 에세이

그렇다. 모든 것은 결국 다 소멸한다. 북극의 빙하보다 모질지 못한 당신도, 나도, 대학도. 당신이 평생을 갈아 넣은 경력도. 당신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가는 자식들도. 소멸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어떤 존재를 지탱했던 조건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멸의 여부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p.125

나는 사랑니가 네 개였고 단박에 네 개를 모두 뽑아버렸다. 의사 선생님은 이가 바르게 나서 굳이 뽑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모두 뽑아달라고 말했다. 필요 없는 것이, 그것도 네 개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나는 줄곧 잇몸 공간을 낭비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사랑니를 뽑았다고 해서 속이 개운해지지는 않았다. 이가 사라진 자리에는 구멍이 생겼고 그곳에는 밥알이나 사과 조각 같은 것들이 제 자리인 양 들어갔다.

사랑니뿐 이었을까. 아닌 것을 견디는 일은 내가 가장 못 하는 일 중에 하나였다. 한 발짝 떨어져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처럼, 나는 내 문제를 남의 문제인듯 볼 수 있는 거리감을 좋아했다. 그래서 문제를 인식하고 나면 그것을 나로부터 끊어낸 뒤 보이지 않는 곳에다 치워버리는 일이 잦았다. 그러고는 혼자서 지난 시간을 복기하는 것이 편했다. 사랑니 뽑듯 문제를 없애버림으로써 정리의 시간을 재촉했다. 진행형인 고통을 손에 든 채로는 합리화가 아닌 객관적 회복기를 갖는 것이 어려웠다.

문제를, 사람을, 관계를, 감정을. 댕강댕강 잘라먹으면서 남은 건 깨끗한 절단면이 아니었다. 소멸은 말 그대로 사라져 없어짐이지만, 그것이 닿아있던 자리의 흔적마저 지우지는 못했다. 다만 나는 그것이 더 낫다고 믿었다. 그렇게 늘 나은 상태에 있고 싶어 했다. 소멸의 상태가 나은 것인가. 그저 쫄보였던 건 아닌가. 물론 고통의 소멸은 곧 나음이겠지만, 그 구멍에는 늘 밥알이나 사과 조각 같은 것들이 제 자리인 양 끼어 들어가서 잡념을 일으켰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고, 몸에 새기고 머리에 새기며 좌우명처럼 외쳐도, 사실 자신이 가장 못하는 일을 좌우명으로 삼게 된다고 했다. 댕강댕강. 나는 소멸을 재촉하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 했다. 소멸을 피해갈 수 있는 예외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그럴 것이니, 어차피 소멸할 것이니, 조금은 시간을 줄 수 있지 않겠냐고. 그 시간을 나 자신에게도 허용할 수 있지 않겠냐고. 두고 보는 것을 정말 못하는 나이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무엇으로 변해갈지 조금은 궁금하지 않냐고. 이런 생각들을 나는 요즘 하고 있다.

소멸하는 중이니까. 어차피 소멸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 소멸의 다음이 궁금하다. 우리 지금의 모습을 잃고 난 다음, 그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알고 싶고 겪고 싶다. 어쩌면 소멸한 다음의 우리 모습이 우연히 더 마음에 들런지도 모르겠다. 소멸의 과정은 얼마나 뜨거울지, 혹은 차가울지. 뜨거워서 좋을지, 차가워서 좋을지. 그저 그걸 두고 보는 것도 정말 값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고 보면서도 결코 나의 두 손과 두 발을 다 놔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한다.

첫 번째 소멸의 방식. 어떤 소명과도 무관하게, 어떤 심미적 흔적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소멸해가는 길이 있다. 마치 상한 달걀을 깨뜨렸을 때 비린 냄새를 풍기고 흐물거리며 퍼지는 노른자처럼. 두 번째 소멸의 방식. 스스로 자신의 소명을 설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을 삼은 뒤, 그 소명을 달성함을 통해 존재 이유를 잃고 스스로 소멸해버리는 방식이 있다. 마치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고 나서 검은 우주 속에서 밝게 소멸해버리는 로켓추진체처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p.126

여기에 더해 나는 세 번째 소멸의 방식을 고민한다. 세 번째 소멸의 방식. 어쩔 수 없음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 하고 생각하며 소멸의 과정과 상태를 받아들이는 길이 있다. 수동적으로 소멸의 과정 속에 자신을 두면서도, 그 이후의 모습을 애정 할 수 있을지 모를 작은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 그렇게 다음 소멸을 기대하며 사는 것. 마치 어제와, 1년 전과, 10년 전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여전히 다른 이유로 서로에게 다정한 엄마와 아빠의 표정처럼.

하지만 꼭 뽑아야 하는 사랑니도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눈 밑에 사랑니가 났다며, 기이한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던 남자를 아직 기억한다. 나선 안 되는 곳에 자리 잡아 온몸에 열병을 내는 사랑니는 지체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역시 사라진 자리에는 구멍이 남을 것이고, 그게 뭐든 간에 그 구멍이 제자리인 양 자리 잡는 것들은 꼭 존재한다. 그래도 뽑아주세요, 선생님. 없애주세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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